자그레브 (1)
자그레브에 도착한 것은 밤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자그레브의 밤 모습은 참 아름다왔다.
수많은 주황색 불빛들이 반딧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Airbnb 주인 청년이 공항에서 우리를 픽업했다.
차안에서, 2살된 아기 하나를 키우고 있는 결혼 4년차 되는 부부라고 자기 소개를 한다.
Boutique Loft Very Central - 조금은 독특한 숙소 이름이다.
에어비앤비에서 평판이 뛰어나게 좋고, 시내와 거리가 몹시 가깝다는 이유로 예약을 한 독채 아파트먼트다.
하지만, 현관을 들어서면서 몹시 낡은 문짝을 발견하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더니, 계단 올라가는 길과 방문에 이르는 그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나면서는 아예 포기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집안은 온통 하얀 페인트 칠을 해놓아 그다지 더러워보이지는 않았지만, 주인 청년이 떠나간 후 집안을 천천히 훑어보면서, 우리 부부는 대화가 점점 없어졌다.
창문을 열어두어야 할 정도로 페인트 냄새는 독했고, 화장실의 샤워 부스는 몸을 돌리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비좁았다.
에어비앤비에서 사용자들이 써놓는 평가를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자로서 이 아파트의 위치 하나는 참 좋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어쨋든 우리는 잠을 잘 잤고, 이튿날 아침 일찌감치 깨어났다.
나가서 산책이나 하다가 아침을 사먹을 요량으로 아파트를 나선다.
반 옐라치치 (Ban Jelacic) 광장
Jelacic는 1848년 오스트리아와 헐가리의 침입을 물리친 장군의 이름이란다.
Ban은 장군 등에게 주어지던 귀족칭호다.
자그레브의 모든 관광은 이 광장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로 북쪽 뒷편으로 돌아가면 돌라치 시장이 있고, 동쪽으로 가면 대성당이 있고... 등등...
우리가 아침 산책을 마치고 점점 뜨거워지는 햇살을 피해 돌아오던 오전 10시경이 되자, 이 광장에는 깃발을 따라 몰려드는 단체관광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참 예쁜 광장이다.
건물의 색깔도 가지가지 파스텔톤이다.
사진의 아래쪽에 보이는 분수는 반 옐라치치 광장 동쪽 구석에 있는 분수다.
이름은 만두세바치 (Mandusevac).
이 분수와 관련된, 가장 충실한 내용의 전설은 이렇다.
11세기 초, 어떤 청년이 집을 떠나 기사가 되었다.
지혜와 용기로 좋은 일을 하면서 여러 지방을 다니던 어느 날, 청년은 Bear Mountain 근처의 어두운 숲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거기서 청년은 길을 잃었고, 결국 목이 말라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오직 비가 내리기만 기다리며 길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 갑자기 아름다운 소녀가 청년에게 다가왔다. 청년은 소녀에게 목이 마르다고 하소연했지만, 소녀에게는 물이 없었다.
소녀는 청년에게 그가 쓰러져 있던 땅을 파보라고 권고했다.
"Zagrebite (땅을 파보세요)!"
청년이 땅을 파보자, 거기서 물이 솟구쳐 나왔다.
청년은 자기를 살려준 그 소녀가 요정일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녀는 자기가 Mandusa라는 이름을 가진, 가난한 고아라고 소개한다.
청년은 물이 솟구친 곳을 Mandusevac라고 이름짓는다.
그리고, 소녀에게 자신과 결혼하면 이곳을 커다란 도시로 만들어 함께 행복하게 살자고 청혼한다.
소녀가 승락하자, 두 사람에게 찬란한 축복의 빛이 쏟아진다.
그리고 미래에 번성할 이 도시의 화려한 환상이 그들에게 나타난다.
(출처 : http://www.likecroatia.com/news-tips/famous-croatian-myths-and-legends/)
Zagreb라는 도시의 명칭은 그렇게 지어졌고, 반 옐라치치 광장에 있는 분수의 이름 Mandusevac 도 그렇게 지어졌다.
분수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 가도 비슷한 미신이 있다.
동전을 던져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Mandusevac 분수도 마찬가지다.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여기에 던져넣으려는 순간, "내 소원이 뭘까"에서 막힌다.
너무 많은 것을 이루었다.
사실 더 소원하는 것은 없다.
아내와 함께 이 먼 곳 자그레브에까지 자유여행을 올 수 있다는 것, 그 정도로 건강하고, 아직까지는 그 정도의 비용을 감당할만하다는 것만으로,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자그레브 한 복판의 이 작은 분수 앞 벤치에 앉아 쉬다가, 나는 수많은 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목이 메었다.
Mandusevec의 분수에서 "감사함"이라는 물이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다.